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 도시, 특히 뉴욕의 맨해튼이나 서울의 강남 같은 계획도시를 보면 길들이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습니다. 이 효율적인 **'격자형 설계(Grid Plan)'**의 뿌리가 사실은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군사 캠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1. 군사적 효율성이 만든 '카드(Cardo)'와 '데쿠마누스(Decumanus)'
로마인들은 정복 전쟁을 치르며 수많은 요새를 지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빠른 소통'과 '질서'였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남북대로인 '카드'와 동서대로인 '데쿠마누스'를 먼저 설정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설계를 공부했을 때 무릎을 탁 쳤던 부분은, 이 방식이 단순히 보기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니라 '누가 처음 와도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한 철저한 실용주의 산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낯선 도시에서 GPS 없이도 대략적인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원리가 이미 2000년 전에 완성된 셈이죠.
2. 하수도와 공공시설: 겉보다 속이 화려했던 로마
로마의 도시 설계가 위대한 진짜 이유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콜로세움 때문만이 아닙니다. 진짜 가치는 땅 밑에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격자형 도로를 따라 체계적인 하수도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사실 "모든 오물은 하수도로 통한다"는 위생 관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전염병을 막고 수만 명의 인구가 한곳에 모여 살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이죠. 현대 도시 공학자들이 로마를 '도시 설계의 교과서'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왜 격자형 도로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을까?
흥미로운 점은 로마 멸망 이후 중세 시대에는 이런 반듯한 길들이 사라지고 미로 같은 골목길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근대에 이르러 다시 격자형 설계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왜일까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산업화 시기에 토지를 효율적으로 나누고, 세금을 매기고, 교통 흐름을 통제하기에는 격자형만큼 완벽한 구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유전자가 현대 자본주의 도시 설계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4. 로마식 설계로 본 우리 동네 체크리스트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동네가 계획도시인지, 자연 발생적 도시인지 궁금하다면 다음 세 가지를 확인해 보세요.
도로의 모양: 교차로가 대부분 직각(90도)인가요?
주요 시설의 배치: 시장, 관공서가 도시 중심부 도로 교차점에 있나요?
확장 가능성: 도로를 따라 건물이 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설 수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설계한 원칙 안에서 살고 계신 셈입니다.
[핵심 요약]
실용주의: 로마의 도시 설계는 군사적 효율성과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격자형'을 채택함.
인프라 우선: 도로만큼이나 하수도와 위생 시스템을 중요시하여 대규모 도시 거주를 가능케 함.
현대의 유산: 뉴욕, 강남 등 현대 계획도시의 구조적 뿌리는 고대 로마의 설계 원칙에 닿아 있음.
[다음 편 예고]
다음 2편에서는 로마의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 생겨난 **'중세의 미로 같은 거리'**들을 다룹니다. 왜 중세 사람들은 일부러 길을 복잡하게 꼬아 놓았는지, 그 속에 숨겨진 방어 전략과 낭만을 찾아보겠습니다.
[질문]
여러분은 반듯한 바둑판 같은 길을 선호하시나요, 아니면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정취를 더 좋아하시나요? 여러분이 사는 동네의 길은 어떤 모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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